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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이순신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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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이미지

충무공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에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32세가 되던 1576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무관(武官)이 되었다.

그는 36세인 1580년에 전라도 발포(鉢浦)의 수군지휘관인 만호(萬戶)가 되었고, 1591년에는 조선 남해의 4개 함대 가운데 한 함대의 사령관 즉,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가 되었다. 이때 그는 장차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여 충실하게 전비태세를 갖추었으며, 한편으로 창의력을 발휘하여 당대무비(當代無比)의 전선(戰船)인 거북선을 제작, 건조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였다. 초기 접전에서는 조선의 2개 함대가 일본 함대에 의해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순신 함대가 출동하면서부터 조선 함대는 승승장구하던 일본 함대를 격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592년 한 해 동안 10여 회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군의 해상을 통한 보급지원을 차단할 수 있었다.

1593년 8월 조선 정부는 이순신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연합함대사령관 즉,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하였다. 이후 4년 동안 그는 열세한 함대를 이끌고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함대를 잘 방어했으며, 최후의 결전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순신은 조선 정부의 권력 암투의 희생물이 되어 삼도수군통제사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한편 이순신이 없는 조선 함대는 1597년 7월 16일의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일본 함대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결국 이로 말미암아 조선의 연합함대는 궤멸되었다. 위기에 처한 조선정부는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였다. 그는 12척의 패잔전선(敗殘戰船)으로 노도와 같이 진격해 오는 일본 함대와 맞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13척의 조선 함대는 133척으로 구성된 일본의 대 함대를 격파하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1년 동안 이순신은 함대의 세력증강에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여 최후의 결전에 대비하였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은 퇴각하는 일본 함대와 결전을 벌여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으나, 자신도 또한 전사(戰死)하였다.

그는 7년동안 40여 회의 해전에서 완승(完勝)을 거두어 일본의 조선정복 야욕을 분쇄하였고, 조국을 멸망의 위기로부터 구출하였다. 조선 정부는 그에게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인들은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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